얘야~ 나 깻잎이 먹고 싶구나 <재일교포 송씨 할머니 이야기>
- 제가 근무하고 있는 일본의 노인 시설에는 재일교포분들이 자주 입소하십니다. 주로 재일교포 1세와 2세 할머니 할아버지들 이십니다. 1세의 분들은 한국어로 대화가 가능하지만, 2세의 분들은 한국어로 대화가 자연스럽지 이어나가기가 어렵습니다. 일본에서 태어나셔 평생을 사신 분들이시기에 주로 일본어 사용하시는 것을 더 편하게 생각하십니다. 이 글에서는 송씨 할머니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려고 합니다. 송씨 할머니의 개인정보 보호를위하여, 성과 이름 그리고 연세에 관하여 약간 수정하였습니다.
아침에 그룹홈으로 출근 하자 마자, 송씨 할머니의 방에 노크를 하고 들어갔다.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사람인지라, 이 시설에 있는 많은 할머니들 중에서 우리나라 할머니들에게 더 신경이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지 않는가. 일본인 할머니들은 일본인 직원들이 조금 더 신경 써줄 것이라 믿는다. 노크를 하고 방에 들어가니 송씨 할머니가 아직 침대에 누워 주무시고 있는 모습 이셨다.
"송씨 할머니, 저 왔습니다. 아직 안 죽고 살아있습니까~?"
조금 거친 인사말 이지만, 송씨 할머니는 내 인사를 들으면 얼굴이 밝아 지신다. 아무도 찾지 않는 이국 땅에서 본인의 이름을 한국어로 누군가 부르는 것 만으로도 눈물이 나올 것 같은 표정을 지으시며 좋아하신다. 나는 송씨 할머니와 대화를 할 때 한국어를 주로 사용하기 때문에, 다른 일본인 직원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 아마 나의 한국어 인사말을 이해한다면 깜짝 놀랄 수도 있다. '아직 안 죽고 살아 있습니까'라니, 한국어를 알면 기절초풍 할 만한 인사말이다.
"그래, 누꼬? 니 왔나? 이제 일하러 왔다고 나한테 인사하러 왔나? 고맙데이~ 나는 아직 안 죽고 살아있다. 잘 안 죽는다. 금방 죽어삐면 속이 편할낀데, 이렇게 죽도 않코 살아있다"
송씨 할머니는 경상도 사투리를 사용하신다. 그리고 나는 경상도 출신이 아니라 사투리를 잘 모르지만, 지금 기억나는대로 적어 보았다.
송씨 할머니는 88세이다. 일제시대에 태어났다고 하지만, 일제시대의 분위기는 잘 기억하지 못하시고, 가장 기억나는 사건은 6.25전쟁이라고 하셨다. 어릴 적에 일어난 전쟁이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게 될지 불안하고 무섭고 하루하루가 정말 피를 말렸다고 하시면서 긴 한숨을 쉬셨다. 송씨 할머니의 집안은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한 집안 이였다고 한다. 일제시대에도 전쟁중에도 밥은 굶지 않으셨다고 하시니 그 정도면 그 시대에 대단한 것 아닌가 싶다. 옛날 이야기를 하시는 할머니들은 항상 굶고 살았다는 이야기만 하셨는데, 송씨 할머니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의외 였다.
송씨 할머니는, 당신의 아버지에 대하여 자주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항상 당신을 무릎에 앉혀두고 일을 하셨다고 한다. 그 시대라면 거의 조선시대 아닌가? 가부장제도의 정점을 달리던 그 시대에 지금에서야 볼 수 있는 다정한 아버지의 사랑을 송씨할머니는 받고 자란 듯 했다. 수십년이 지난 후 출생한 나도, 아버지에 대한 어릴 적 기억 이라고는 나를 혼내고 매를 드시던 모습 밖에 떠오르지 않는데, 송씨 할머니의 경우는 정말 특이했다. 옛 부터, 부유한 집안이 평온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것은 정해진 인과관계인 것일까. 아버지의 사랑 덕분인지 몰라도 송씨 할머니는 나에게 아버지가 보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셨다. 이상하게 어머니는 특별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지만, 아버지가 보고싶다고 했다. 어릴 적에 송씨 할머니의 다리를 주물러 주시면서 [다리가 길어져라, 길어져라]라며 주문을 외우며 사랑을 주셨던 아버지가 생각난다고 자주 말하셨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아버지의 딸사랑은 시대적인 배경과는 크게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 시대에 그렇게 자식사랑을 표현했다고?
송씨 할머니는 부산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은 마산에서 자랐다고 하셨다. 그리고 20대의 젊은 시절에는 경주 불국사 근처에서 여관을 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직업군인이던 남편을 만나 강원도 양양에서 30대를 보내셨다고 했다. 그리고 젊은 나이에 남편을 사별하고 서울로 가서 삶을 이어오셨다고 했다.
"니, 서울에 필동 이라고 들어봤나? 나 가 필동 에서 여관을 했었다. 그 때 돈 많이 벌었데이~"
라며 필동 에서 생활 하셨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나는 서울을 잘 모른다. 서울에 필동 이라는 곳이 있는지 지금도 모른다. 송씨 할머니는 필동 에서 여관을 운영 하셨다고 했다. 필동 에서 여관을 운영하고 계실 때, 지방 출신의 가수 지망생 들이 자주 올라와서 그 여관에서 가수가 되기 위해 준비를 했었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그리고 그 중 한 명은 굉장히 유명한 가수가 되어서 텔레비전에 매일 나왔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그게 누구인지 여쭤봤지만, 이름이 기억이 안 난다고 하셨다. 얼굴을 보면 아는데, 나이가 들어서 이름이 기억이 안 난다고 하셨다. 사실, 송씨 할머니도 인지증을 가지고 계셔서, 송씨 할머니의 모든 이야기가 사실인지 알 수 없다. 인지증의 특징은, 예전의 기억과 현재의 상황이 섞이기도 하고, 본인이 경험하지 않은 것과 경험한 것들이 혼재 되어 있는 경향이 있다.
송씨 할머니는, 언젠가 당신이 만주에 살았던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하셨다. 마을 사람들과 도시락을 싸들고 뒷 산에 소풍을 가서 자리를 펴고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산에서 곰 두마리가 내려와서 사람들을 잡아 먹었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셨다.
"송씨 할머니는 어떻게 살아 돌아왔어요?"
라고 묻자,
"나는 나무에 올라가서 가만히 있었어. 그리고 곰이 사람들을 산 채로 다 잡아먹고 산으로 올라갔을 때, 나무에서 내려와서 마을로 도망쳤어"
라는 이야기도 하셨다. 이 섬뜩한 이야기는 사실인지, 지어낸 이야기인지, 텔레비전에서 본 것과 기억이 혼재 되어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인지증이 있는 노인들에게서 어떤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판단하지 말고 듣고만 있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진실을 알려고 할 필요도 없고, 거짓이 아니냐며 다그칠 필요도 이유도 없다. 부정할 필요도 없다. 그냥 그대로 판단하지 않고 그저 경청하는 것이 옳은 방법이다.
송씨 할머니는, 첫 번째 남편과 사별 후 필동 에서 여관을 운영하던 중, 아는 사람의 소개로 맞선을 보았었는데 그 사람이 두번째 남편이라고 했다. 남편은 재일교포 2세 로 일본에서 태어나서 사시던 분이셨다. 한국여자와 결혼을 하고 싶어서 소개를 받았다고 했다. 남편이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결혼생활을 하시다가 송씨 할머니가 한국생활을 정리하고 일본으로 완전히 들어오셨다고 했다. 일본으로 처음 오실 때도 비행기를 타고 오셨다고 하니, 그 시대에 대단히 부유한 삶을 사신 것 같다.
송씨 할머니는 남편이야기를 하며, 남편이 아주 남자답고 듬직하게 잘 생긴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도 하셨다.
"남자가 인물이 아주 좋았지. 듬직하니 배도 나왔었고, 딱 김일성이 같이 생겼었어"
"네??? 김일성이요? (뭔 기준이 삼천포로 간다니?)"
"응. 배도 나왔었고 훤칠했어"
"네...(맙소사 ㅇ.ㅇ)"
생활력이 강했던 송씨 할머니는, 일본에서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닥치는 대로 일을 하여, 이 곳에 집을 여러 채 구입하신 후 다시 그 집을 세를 주어 월세를 받아서 생활 하셨다고 하셨다. '해외에서 생활력이 대단 하셨구나' 라고 느꼈다. 그리고 부족함 없이 한 평생을 살고, 나이가 들어 집을 하나 둘 정리하고 이제 노인 시설로 들어와서 생활 하시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혼자서 집에서 생활을 하니, 외롭고 쓸쓸하고 가끔 몸이 아프면 나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여기 들어왔는데 여기는 너무 답답하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가장 힘든 것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너무 힘들다고 하셨다. 반평생을 일본에서 사셨지만 입맛은 여전히 한국 입맛을 가지고 계셨다. 집에 있으면, 본인이 김치 하나만 담가서 밥에 물 말아서 먹으면 꿀맛 이건만, 여기서는 그것이 안되니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여긴 반찬을 많이 주긴 하는데, 간은 하나도 안맞고, 국은 밍밍하고, 고기 반찬은 달기만 달아. 여기서 밥 먹으면 넘어올 것 같아서 밥을 못 먹겠어. 집에서 무 잘라서 고춧가루 촥~뿌려서 소금 살짝 뿌려서 무생채 하나 만들어서 밥 한그릇 먹으면 좋겠다~"
라는 이야기를 하셨다. 이렇게 송씨 할머니는 가끔 나를 옆에 앉혀두고 본인의 인생이야기를 들려주시기도 하시며, 신세 한탄을 하시기도 하시며 시간을 보내신다. 아마도 같은 나라 사람이기에 느끼는 특별한 감정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본인의 생각을 한국말로 이야기 할 때, 속이 시원한 느낌이지 않을까.
이런 송씨 할머니도 가끔 나에게 황당한 질문을 하실 때가 있다. 하루종일 한국말로 본인의 살아온 이야기를 하시다가, 난데없이 나에게 물으셨다.
"니 조선사람이가?"
라는 질문을 하셨다.
"할머니, 하루종일 저한테 한국말로 이야기 하셔 놓고서는 이제와서 조선사람이냐고 물어 보시는 거예요? 지금도 제가 한국말로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라고 하자,
"하이고 마, 반갑데이. 여기서 조선사람을 보네"
"네.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만, 할머니가 저를 오늘 처음 보신 것이 아니고 5년째 보고 계시는데요?"
"아, 참말이가? 미안하데이. 내 나이가 들어가 머리가 빠가가 되삐릿따"
그 다음날에는,
"안녕하세요. 어제는 잘 주무셨어요?"
라고 인사를 드리자, 나를 빤히 쳐다보시더니
"내 니를 어디서 봤는데? 어디서 봤드라? 니 나 아나?"
라고 하셨다. 그래서 딱히 할말도 없고 잠깐 기분 이라도 좋으시라는 의미로 농담을 섞어 대답을 했다.
"할머니가 불국사에서 여관 하실때, 옆집에 살았었어요"
라고 했더니,
"참말이가? 니 경주 살았었드나? 하이고 마, 반갑데이"
라고 하시기도 하셨다.
송씨 할머니를 보며, 외국에서 평생을 살다 맞이하는 노년은 참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맘편히 한국어로 이야기를 할 수도 없고, 일본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다면, 음식문제도 굉장히 힘들어 보인다. 먹는 것이 삶의 기본 중에 기본인데, 무슨 낙으로 하루 하루를 지낼 수 있을 것인가.
며칠 전에는 나를 부르시더니,
"야~야 나 깻잎이 먹고 싶다. 죽기 전에 깻잎 이라도 먹어봤으면 좋겠다"
라는 말씀을 하셨다. 죽기 전 소원 이시라니 구해드려야지 라는 생각으로 그 날 퇴근하면서 한국식품점에 들러서 깻잎 통조림을 하나 구입했다. 그리고 다음날 식사 때 깻잎 통조림을 까서 드렸더니,
"아이고~ 이거 어디서 났노? 고맙데이~ 이 귀한 거를 어디서 가지고 왔드나"
라고 하시며 맛있게 식사를 하셨다. 죽기 전에 소원 이라고 하시더니 정말 맛있게 드셨다. 다음에 다시 한국식품점에 들러서 다시 사서 드려야 할 것 같다.
항상 건강하세요 송씨 할머니~
끝.